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블라디미르 레닌 (문단 편집) == 여담 == * 레닌이 죽은 이후 스탈린에 의해 추진된 레닌 우상화에 따라 레닌의 동상은 소련 곳곳에 세워졌다. 냉전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 사회주의 국가라면 레닌 동상이 여러 곳곳에 세워졌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공산주의 몰락과 함께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에 있던 레닌 동상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일부 국가나 지역에 따라서는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 러시아에서는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에 레닌 동상 중 상당수가 철거되었고, 폴란드나 체코 등 반러감정이 강한 국가들처럼 레닌 동상이 완전히 혹은 거의 대부분 철거된 국가들도 있지만 너무 많이 만들어진 탓에[* 이건 단순히 많이 만들어져서라기보다는 1990년대 러시아 경제사정이 안 좋아져서 철거를 미처 못했고, 옐친 시절 실정에 대한 반동으로 소련에 대한 향수도 강해지다 보니 레닌 동상을 굳이 철거할 필요가 있나라는 식으로 여론이 반전되다 보니 철거 논의가 힘을 잃은 것에 가깝다. 현재도 [[통합 러시아]] 등에 의해 철거 논의가 간간히 벌어지기는 하지만 반응은 미미한 편.]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레닌 동상이 5,300여 개가 넘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러시아 주요 거리나 광장에서 레닌 동상을 쉽게 볼 수 있는 편이다. 특히 시베리아나 극동과 같은 오지에서 많이 보이는 편. 노보시비르스크의 오페라극장 광장에도 큰 동상이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러시아군이 동부지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공산당이 일개 야당에 불과함에도 레닌 동상을 복구하는 일이 있었다. * 우크라이나에서도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전까지는 적잖은 수가 잔존하였으나, 2010년대에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를 제외하고는 전부 철거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레닌 동상을 소련 체제의 상징이자 러시아 압제의 상징으로 여겨 대부분 철거하였으며, 다른 소련 시절 동상들도 [[탈공산화]]의 여파로 대부분 철거되었다. * 스위스의 사진가인 닐스 아커만이 철거당한 레닌 조각상들의 현재 모습을 추적한 사진집 《Lost in Decommunization》을 발간해 현재의 동상들의 모습들을 담기도 했는데, 허리 윗부분만 싹둑 잘려나가 방치되거나 지하실에 곰팡이 낀 채로 처박히거나 완전히 산산조각나서 코만 한조각 발견되거나 공장 구석에 방치되거나 철조망에 걸려 있거나 하는 취급을 당하고 있다. 개중에는 아주 희한한 최후를 맞이한 케이스도 있는데, 오데사에 있는 조각상은 알렉산드르 밀로프라는 조각가가 [[다스 베이더]]로 깎아버렸다.[[https://www.nack.ch/lost-in-decommunisation-lenin-ukraine/|#]]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enin_mask.png|height=4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arm6.static.flickr.com/5230880986_cb1f45d658.jpg|height=4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r.academic.ru/Fremont_Lenin_Christmas_2006.jpg|height=400]]}}} || * 좀 특이한 사례로, 시애틀에서는 그의 동상을 매입해서 매년 성 [[패트릭]]의 날, 하누카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마다 트리 겸 장식물로 활용하고 있다. 코로나 시국엔 한동안 빨간 마스크를 씌워놓았다. 이 동상은 본래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것으로, 동구권 붕괴 이후 버려져 있던 것을 한 영어 교사가 매입해 들여와서 전시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반공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철거를 요구하고 있지만, 사유지에 있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간혹 반공주의자들의 [[반달리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기네스북]]에도 오른 바 있는데, [[바이칼 호수]] 근방의 [[울란우데]]라는 도시에 세워진 레닌 두상이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 머리이라는 이름으로 1991년 등재된 것이다. 폭 4m 이상에 무게는 42톤짜리로 레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기존의 레닌 상 셋을 대신해 세운 거라고 하는데, 소련 붕괴 후 이걸 철거하자니 철거 비용이 너무 나와서 그냥 방치해 놓은 것이 기네스북에 올라가면서 애물단지였던 상이 본의 아니게 관광 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uthern_Pol_of_Inaccessibility_Henry_Cookson_team_n2i.jpg]] * 남극 도달불능점에 모스크바 방향을 바라보는 플라스틱제 레닌 흉상이 있다.[[http://thumbnail.egloos.net/600x0/http://pds22.egloos.com/pds/201104/24/63/b0004363_4db3ba4a82f0c.jpg|#]] 이 흉상을 두고 웃기는 [[냉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소련 탐사대가 이 흉상을 세웠음을 안 미국이 도달불능점으로 탐사대를 파견해서 흉상을 [[워싱턴 D.C.]] 방향으로 돌려놓았고, 이를 안 소련은 다시 도달불능점을 찾아 흉상을 모스크바 방향으로 돌려놓았다.[[https://youtu.be/gNBOO_ggypg|#]] * 러시아의 문호인 [[레프 톨스토이]]의 애호가로,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고 극찬할 만큼 높이 평가했으며 이 때문에 공산 혁명 이후 과거 러시아 제국의 유산이 비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은 갈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 첼리스트 그리고리 퍄티고르스키(Григорий Пятигорский) ^^(1903년 ~ 1976년)^^가 15살 나이에 [[현악 4중주]]단을 만들었는데 베토벤 4중주단이라는 이름을 지어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존경을 내비쳤다. 그런데 당에서 이 이름을 레닌으로 바꾸라고 명령했고, 퍄티고르스키는 "레닌은 혁명가이지 음악가가 아니다! 죽어도 못 바꾼다!"며 당에 대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레닌이 직접 그를 만났고, 퍄티고르스키는 죽음을 각오했는데 레닌은 껄껄 웃으면서 >"자네 말이 맞아. 난 음악에 대하여 도통 아는 게 없는데 내 이름을 악단으로 짓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예술가로서 그 용기 정말 멋졌네. 아, 이름이야 자네 마음껏 짓게나." 하며 되려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레닌의 격려와 달리 주변에선 아무래도 레닌 4중주단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하여 결국은 이 이름으로 바꿔 활동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분위기로선 자유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어렵다고 느낀 퍄티고르스키는 18살 나이로 식구 및 음악 동료들과 같이 해외로 망명해 버렸다. 국경을 넘을 때 수비병들에게 걸렸지만 무사히 망명에 성공했다. 다만 그가 아끼던 첼로가 이 과정에서 부서졌을 뿐.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레닌은 "나는 음악가 하나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건가."라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 '''[[민영환]]'''을 만날 뻔한 적 있다. 1896년 7월 3일, 민영환이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해 외교 활동을 모두 치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문물을 두루 살펴보는 중 감옥을 들렀는데, 레닌이 이 감옥에서 수감 중이었다. 민영환이 레닌을 면회했다는 식의 직접적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민영환의 당시 여행기 《해천추범》에는 감방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도 있어서 아마 감옥을 들여다보던 민영환이 레닌과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물론 외국에서 오신 나름 높으신 분이었던 민영환이 한낱 반역자이었던 레닌을 진짜로 만났다 해도 별 관심은 없었겠지만. * 2020년 3월 7일에 독일 법원이 겔젠키르헨시에서 레닌 동상을 세울 수 있는 판결을 내렸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1&aid=0011456012|#]] * [[우드로 윌슨]]보다 앞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여 세계에 큰 파급력을 미친 사람이다. 단, 민족자결주의가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서는 적국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민족의 자결을 본격적으로 구호로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내전 시작 시기에 봉기했던 구 러시아 제국 산하 체코 군단도 이러한 목적으로 차르 정부에서 육성한 것이었다.[* 물론 이 군단의 주 목적은 어디까지나 범슬라브주의라는 것이 정설이긴 하다.] 레닌의 민족 자결론은 이를 자타를 가리지 않고 적용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해체 및 식민지로부터의 우호 획득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고, 그 결과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을 꾀하던 국외의 여러 지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다.[* 그런데도 중국은 티베트나 위구르 등은 독립해선 안 된다는 이중잣대를 내밀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중국의 붉은 별》을 보면 [[마오쩌둥]]은 조선마저도 중화연방의 일원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인터뷰한 작가인 에드거 스노우가 따로 지적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다.] 다만 러시아 제국의 해체 이후 내전기에 캅카스,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부하라, 히바 등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면서는 당시 민족문제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어도 러시아 제국의 권역 내에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거부하되 프롤레타리아 민족주의는 받아들인다는 식의 논리로 선회하기도 했다. 단, 레닌의 민족 자결론을 단지 자국 이익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생각했다고 해석하는것은 편향된 시각이다. 애초에 서강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식민지들의 경제적 착취 문제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분석한것이 [[레닌주의]], 즉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가한 이론적 공헌이다. 레닌은 민족 자결주의, 즉 서강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항하는것을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이론적 배경은 ‘제국주의론’을 비롯한 그의 저작들에서 여러번 명시된 바 있다. 또 제정 러시아 시절 중국에게서 강탈한 영토를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중국에게 한 적도 있다. 이를 감안하면, 그의 반식민주의적 태도에 대한 진심성은 부정하기 힘들다. 한편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승인요구를 철저히 묵살[*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열강들은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던 자세로 일관했었고, 일본 제국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한 반면, 소련은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지원도 했었다.[* 실제로 아시아 여러 지역의 여러 지도자급 인물들이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쑨원]]도 이러한 전략적 필요성에 공감해 소련과 손잡았다. 독립군 무장이 보통 [[모신나강]]이나 [[PPSh-41]] 같은 소련제 무기인 것으로 보아 무기도 지원해 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환 중 하나로 임시정부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레닌을 여러 차례 만나고 조언을 구하는가 하면 400만 루블이라는 거금의 공작금을 원조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이 자금의 행방을 둘러싸고 임시정부가 더 분열되었고,[* 이는 독립운동가들 사이 내부 계파가 생각이상으로 분열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은 [[김립(1880)|김립]]은 [[김구]]에게 사살되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김립이 죽을 만해서 죽였다고 써 놓아서 다들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야 밝혀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조. * '''20대일 때 벌써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25세가 되던 1895년에 찍은 머그샷을 보면 이미 탈모가 상당히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수염도 자라는 대로 내버려뒀던데다가 목소리도 걸걸하여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왠지 무서워했다. 이 덕에 소비에트 정권이 생긴 이후에 국가원수의 사진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조차 꼴이 말이 아니라서, 지도자의 공식 사진은 1918년에 가서야 최초로 언론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이런 외모가 해외로 피신할 때는 의외로 도움이 되었는데, 가발을 쓰고 면도만 하면 완벽하게 변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일:Ewo5KnW.jpg]] 이 사진이 1917년 핀란드 망명 시절 레닌의 변장 모습. 정말로 변장한 거라곤 면도하고 가발을 쓴 것밖에 없다. 이때 레닌의 수염을 면도해준 사람은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레닌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누가 봐도 [[핀란드]] [[농부]]로군. 이러면 잡힐 일이 없겠어!"라고 크게 흡족해했다고 한다. * 레닌은 학창 시절에 최우수 학생이었으므로 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교육 방식은 미칠듯한 암기와 물어봐서 답을 못 대면 패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레닌의 집에는 밤이면 밤마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상급자에 대한 절대복종을 강요하여 동생에게 울라고 명령한 다음 반응이 없으면 쥐어패서라도 울린 다음 너는 네 명령에 복종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머니마저 동생들을 그만 좀 때리라고 말렸을 정도다. * 당시 러시아 제국의 대학교에서 각광받던 학과는 과학, 기술 혹은 의학과였다. 실제로도 누나와 형 모두 그렇게 진학했고 마찬가지 성적이 뛰어났던 레닌도 그럴 것이라고 보였지만, 레닌은 뜬금없이 당시 비인기 학문인 법학을 선택한다. 레닌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의 선택을 말렸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결국 레닌은 법대에 진학했다. * 동상이나 초상화 등에서 옷깃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긴장했거나 두려울 때 하던 버릇이었다. 이 덕에 옷깃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옷을 한번 사면 낡아 빠질 때까지 입었기 때문에 더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파리 망명 당시 발에 안 맞아서 못 신는 구두를 버리지 않고 트로츠키에게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 의외로 구두쇠였는지도 모른다. * 위와 마찬가지 맥락으로, 레닌의 사진을 보면 양복이나 코트를 거의 풀어 헤치고 있는데, 기본적인 이유는 더워서다. 활동량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었던 듯 하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집안의 온도를 섭씨 16도 이상 올리지 못하게 했으므로 아내 크룹스카야는 집안에서도 옷을 껴 입고 있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나중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주치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온도를 조금 더 올리긴 했지만 그때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 [[외국어]] 능력이 뛰어났다. [[제정 러시아]] [[귀족]]층의 공용어는 [[러시아어]]가 아닌 [[프랑스어]]였는데, 레닌은 하급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다. 학창 시절엔 [[라틴어]]와 [[그리스어]] 성적이 좋았고,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 이후 외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독일어]]와 [[영어]]를 익혔다. 거기다 [[폴란드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다만 망명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던 외국어는 프랑스어 정도였고, 독일어와 영어는 이후 [[스위스]][*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함.]와 [[영국]]에서 생활하며 유창해졌다. *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계 본좌이지만 사실 그 자신은 아버지가 심비르스크 시 총 장학관인 쁘띠 부르주아로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부유하게 살았으며, 이때 뿐만이 아니라 그는 '''평생 육체노동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특히나 노동자와 자신을 분명히 다른 계층으로 보고 있었으며 집에도 하녀를 두고 있었다. 본래 공산주의의 시조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노동자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그 외에도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가 중에는 오히려 출신 신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계층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의 차이라는 아이러니함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연구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선 레닌을 시작으로 중국의 [[마오쩌둥]]도 젊은 나이에 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부자였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도 아버지가 농장 소유주였고 [[체 게바라]]도 아버지가 귀족 출신에 병원 원장이었다. [[레프 트로츠키]]는 8살 때 당시 우크라이나에선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열대 관엽식물이 잔뜩 놓인 사진관에서 입학 기념 사진을 찍을 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폴 포트]]는 왕의 외척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왕족들과 교류했고 [[쑤파누웡]]은 '''왕자'''였다. 반대로 가난한 집안 출신들로는 [[이오시프 스탈린]], [[저우언라이]], [[요시프 브로즈 티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호찌민]]을 들 수 있는데, 이 와중 저우언라이랑 호찌민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자체는 확고한 몰락 유학자 선비 집안, 스탈린도 비슷하게 주머니는 텅텅 비어도 글은 배우는 신학교를 나오는 등 고등교육에 대한 인식과 기회 자체는 있는 배경 출신이 많았다. 문제는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려면 고대 철학에서부터 헤겔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짜배기 가난한집안에 독학으로 공산주의를 배운 인물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있다. * [[소련]] 시절에 나온 레닌에 관련된 책에서는 그가 아버지 사후 기지를 발휘해 가족들을 부양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레닌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도 어머니 밑에서 값비싼 여러가지 부대비용을 요구하는 벅찬 존재였다. 위에서도 썼지만 그는 육체노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단지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거나 도서관에서 아예 안 오거나 했을 뿐이다. 이 덕에 레닌의 어머니는 영지를 팔기도 하고, 레닌의 요구에 따라 이사를 다니며 집에 세를 내거나 하는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레닌의 어머니는 러시아 제국의 국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국채에서 나오는 이자가 레닌의 망명비용으로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나마 사치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기는 했다. * 학창 시절에 담배를 달고 살았었다. 이에 어머니가 "담배는 건강에 해롭다."라고 충고했는데, 이때만 해도 레닌은 그 충고를 무시하고 계속 담배를 피웠지만 어머니가 보다못해 '''"너에게는 네 담뱃값으로 가족의 재산을 소모할 권리가 없다."'''라고 지적하자 반박할 수 없었던 레닌은 즉시 금연했다.[* 반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은 담배를 신나게 피웠다.] * 형 알렉산드르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자, 레닌의 담임 교사는 아직 어린 레닌에게 이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그는 동요하지 않고 "형이 스스로 옳은 일을 하였다고 여기고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면, 형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형의 국가반역 행위 덕에 레닌은 대학교에서 뭔 사건만 터지면 주동자로 몰려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다가 청강생으로 법학 공부를 겨우겨우 하고 졸업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수석이었다. 변호사 면허도 최우수 성적으로 받고 사무실에 취직한다. 그러나 이 당시 레닌은 사소한 소송에서도 매번 패소한 데다가 한 달에 대략 6번 정도의 의뢰만을 받았을 정도로 이 일에 관심이 없었다. 즉 그저 생계를 위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서민들의 억울함과 사회 현실의 부조화 등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레닌 에센스 중 하나인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 레닌은 책을 사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쪼들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독촉해서라도 돈을 구하거나 빌려 책을 샀을 정도로 유명한 책벌레다. 책의 요약 및 정리하는 능력이 일반인과는 넘사벽 수준이었고, 칸트나 헤겔,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고 비판과 개인적인 주석까지 달 정도의 수준이었다. 토론에 들어가면 논쟁에서 유리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많게는 400권씩''' 읽었다. 또한 5,000단어로 된 문서 하나 쓰는 데는 4시간이면 충분했으므로, 레닌이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연설가이자 세계구급 논객이었다는 것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모스크바 대학을 나오고 당내 최고 이론가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레닌에게 논쟁으로 이긴 적이 없다! 인터넷에서 반박 근거를 바로 찾아낼 수 있는 현대에도 아는 게 많고 글과 말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꺾는 건 매우 어렵다.] * 아이러니하게도 공화혁명의 시발점이자 공산주의의 발상지인 프랑스를 싫어하고 자본주의의 상징국이자 세계 최대의 제국인 영국을 좋아했다. 레닌은 프랑스 망명시기 프랑스를 두고 '''더럽고 규칙도 없는 제일 추악한 곳'''이라며 욕을 퍼부었을 정도. 당시 그가 살았던 아파트의 맞은 편에 살던 푸줏간 주인이 매일같이 소시지를 만들어대는 통에 풍기는 돼지 창자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레닌은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열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앞집 사람은 독일계였다.''' [[파일:external/www.schachclub-badsoden.de/lenin_chess_with_bogdanov.jpg]][* 망명 시기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체스를 두는 레닌의 모습. 가운데 있는 인물은 [[막심 고리키]]이다.] * 레닌은 만성적인 위장 질환을 앓았다. 주치의들이 광천수를 마시도록 처방하고 각종 검사를 해봐도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는데, '''원인은 다름아닌 [[체스]]'''였다. 실제로 레닌은 체스를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레닌은 체스 도중 좋은 수가 떠오르면 숙이고 있던 상체를 갑자기 일으키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버릇이 몸에 힘을 주게 되어 위장에 무리를 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실제로 체스를 끊자 고통이 많이 사그라졌다. 사실 알고 보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인데, 특히 신경쇠약은 항상 달고 다녔으며 불면증으로 며칠이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생하기도 했다. 그의 말년 뇌일혈이나 기타 사소한 질병들은 그의 아버지 쪽 가족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 원래 '''힘이 장사였다'''. 학창시절에는 실제로 성적도 최상위권이었고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만약에 자신이 책을 읽을 때 시비를 거는 학생이 있으면 폭력을 시전. 덕분에 레닌이 책을 읽고 있을 때는 아무도 그의 옆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평범한 강도는 그냥 제압해 때려 눕힐 수 있을 정도였고, 토론 자리에서 언성이 높아질 때 자기 측의 인원 중 하나가 폭력을 쓰려고 하자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와서는 "논쟁의 자리에서 폭력을 쓰는 자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또 [[2월 혁명]] 이후 독일에서 러시아로 향할 때 기차 안에서 수상해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자, 다짜고짜 그 사람을 기차의 플랫폼으로 던져버렸다. * 운동을 좋아하여 볼가 강을 따라 카누 타는 것는 것을 어려서부터 즐겼을 뿐 아니라 스키와 등산도 좋아하여 알프스를 등반하는 것도 즐겼다. 따라 온 일행들이 퍼지면 "벌써 퍼지는 건가?"라고 핀잔을 준 뒤 그래도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갔다. 국가원수가 된 이후에도 차를 타기보단 크렘린 주위를 자주 걸어다녔으므로 강도를 만났던 적도 있고 저격 미수사건도 이 도중 일어났다. * 레닌은 패션, 요리, 청소, 집안 인테리어 등에 대해서 굉장히 무지하였다. 옷도 누가 사주지 않으면 '''입던 옷만 계속 입었고''' 집에서도 누가 요리를 안 해주면 '''그냥 굶었다.''' 실제로 일만 하는 혁명 로봇 수준.[* 레닌의 초상화에서 그가 입은 셔츠가 다운버튼 스타일이라 패션 리더가 아니냐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다운버튼이 아니고 넥타이가 풀어지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카라를 조이는 링크버튼을 끼운 것으로 당시에는 꽤 많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탭 카라라는 이름으로 쓰이며 버튼다운보단 훨씬 고전적인 아이템으로 꼽힌다.] 1917년 비밀열차를 타고 돌아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는 유명한 사진과 그림 당시의 말쑥한 옷차림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노동자와 군인들이 귀국한 레닌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카를 라데크가 스톡홀름에서 열차를 멈춰 백화점에 목불인견 상태의 레닌을 끌고 가 사 준 옷이라 한다. * '''다혈질에 자타공인 아가리 파이터'''로 유명하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역에서 실제 객차의 자리수보다 표를 많이 발권하는 오류로 승객들과 승무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레닌은 분명히 올바른 좌석 표를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열차가 지연되자 '''승강장으로 박차고 나가 승무원을 붙잡고 입배틀을 시전''', 결국 모두 타고 갈 수 있게 한 적이 있다. 설전이 붙으면 상대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논쟁했으며 이 시간이 몇 시간씩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말년에 투병 중이라 말도 잘 못하는 레닌을 상대로 논쟁했을 때도 '''백이면 백 털렸으며''' [[볼셰비키]] 최강의 이론가이자 꿀리지 않는 아가리 파이터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레닌과의 논쟁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다만 레닌을 말빨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레닌이 가장 말싸움으로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었고,[* 레닌은 보그다노프를 반박하고 출당하기 위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책까지 저술해야 했다.] [[레프 트로츠키]]와도 논쟁 중 밀려서 트로츠키의 의견이 옳다고 인정해야 했던 적이 한 번 있다. * 소비에트의 국가원수가 된 이후, 관용차로 당원들이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심없던 레닌은 시큰둥한 반응이었고, 한번 타 보았을 때 눈보라에 바퀴가 박혀 버려 운전사와 함께 차를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돌아와서 '''"이 차는 사치품일 뿐 쓸모가 없다!"'''라고 일갈하며 내다 버리라고 명령했다. 왜 레닌이 자동차를 사치품이라 칭했냐면, 당시에는 자동차 자체가 진귀한 명품이었다. 1920년대 시점에서는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나 자동차가 보급된 수준이었고,[* 이것도 포드 사가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을 개발, 자동차를 염가에 팔아먹을 수 있게 만들어서 그렇지 그게 아니었으면 자동차의 대중화는 훨씬 늦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과 식민지에서는 자동차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위급이나 일부 부유층이나 타고 다닐 수 있던 수준이었고, 훨씬 이후에도 고급품이자 부의 상징이었다. 당장 소련만 해도 자가용의 대중화는 늦게 이루어져서 자동차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라다 공장이 완공되고 나서부터의 일이었으며, 한국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파일:external/www.vendyatelier.cz/lenin.jpg]] 하여튼 레닌의 일갈에 당황한 각료들은 차량에 무한궤도와 썰매를 달아서 눈길도 잘 달리도록 만들었는데, 이렇게 개조된 이후에 타 보곤 그제서야 제 기능을 한다며 마지못해 이용했다. 그리고 이 실버 고스트는 [[https://en.wikipedia.org/wiki/Gorki_Leninskiye|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레닌의 별장]]에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f/Rolls-Royce_Silver_Ghost_K%C3%A9gresse.jpg|전시되어 있다.]][* 위 기록사진보다 완성도가 좋은데, 위 기록사진은 일단 급한 대로 기능부터 추가한 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실제로 레닌은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그다지 좋아했던 편이 아니다. 후에 뇌일혈로 불구자가 되었을 때, 영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전동휠체어를 선물했을 때도 참전 군인들에게 주라고 거절했었다. * 깔끔하고 정돈된 상황을 좋아했고 주변인에게 그렇게 요구했다. 특히 자신의 집무실 이외의 장소는 '''어질러지든 더럽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집무실에서만큼은 업무를 볼 때 연필을 반드시 뾰족하게 깎아서 길이를 맞추어 일렬로 배치해야 했고, 자리에 앉을 때 책상을 반드시 걸레로 닦은 뒤에야 업무를 보았다. 뇌일혈로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크렘린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물건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러 올 정도. 집무실에 있을 때 소음이 들리는 것 또한 매우 싫어해서 크룹스카야는 그가 집무실에 있을 때면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타인이 집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면 밖의 날씨가 어떻든 무조건 창문을 열어 버렸다. 일례로 스탈린이 집무실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자 레닌은 창문을 열었고, 스탈린은 담배를 껐다.[* 레닌이 "이 아시아놈 같은 작자를 보게! 할 줄 아는 건 앉아서 담배 빠는 것밖에 없잖아!" 라고 소리치며 창문을 열었고, 레닌의 말에 화가 치민 스탈린이 창 밖으로 파이프를 던졌다는 설이 있다.] * 특히 아이들을 좋아했다. 집에 아이들이라도 놀러오면 근엄한 모습을 내버리고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방 안을 뛰어다니는 등 정신이 없었다. 이를 본 볼셰비키 당료들이 '''오히려 당황해 했을 정도'''이다. 특히 레닌은 늘 손주나 다른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했다. 다만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는 병을 앓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따라서 레닌의 직계 자손은 없다. *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논객답게 연설과 토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말년에 체력적으로 매우 무리가 따르는 상황에서도,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설을 감행하기도 했다가, 연설 직후 기절한 적도 있다. 그러나 비생산적인 논쟁이나 논쟁을 위한 논쟁은 매우 싫어했으며, 논쟁이 무익하다고 판단할 때는 그냥 상대를 하지 않았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노선차를 둘러싼 논쟁이 도저히 해결이 안 되자 깔끔히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당된 것은 레닌의 이런 면도 크게 작용했다. * [[러시아 혁명]]이 완수되고 크렘린이 집무실이 되었을 때, 레닌은 거대한 크렘린 궁전의 '''딱 세 방'''만을 사용했는데 침실, 집무실, 서재이다. 이후 대부분의 소련 서기장들은 이러한 레닌의 검소함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비슷한 방식의 구역을 사용했다. 이 방들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나, 건물 자체가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 호신용으로 항상 [[리볼버]]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렀던 적도 있다. * 사후 1930년에 그를 기리기 위하여 소련 최고 등급의 국민훈장인 [[레닌훈장]]이 제정되었다. * 레닌이 사망한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 동지가 도대체 어떻게 천재적인 혁명적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주제로 그의 뇌를 절단해 세계 각지에 보내 [[공밀레]]를 시전했다. '''당연히 [[답이 없다]].''' 그러나 독일의 한 과학진이 레닌의 뉴런 집합체가 일반인보다 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 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서 반대파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한때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마르토프는 [[10월 혁명]] 후 레닌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냐는 질문에 "온종일 혁명만 생각하고, 혁명에 대한 글만 쓰고, 혁명에 관한 글만 읽는 사람이 어찌 집권할 수 없었겠소."라고 되물었다. 레닌은 한때 혁명 동지였으나 노선 차이로 갈라진 [[멘셰비키]] 인사들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며, 옛 동지 마르토프도 해외 망명을 허가해줬다. *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 혁명가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과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이 있었다. 2004년 EBS에서 방영한 레닌의 전기영화 레닌의 혁명으로 가는 열차(Lenin:the Train, 1988)는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혁명가들이 봉인열차를 타고 스위스를 떠나 독일을 횡단하면서 러시아로 갈 때 벌어진 일화를 다루고 있다.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에게 크룹스카야와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재촉하지만 영화에서 레닌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혁명가가 조강지처를 버린다면 도대체 누가 그 혁명을 지지하겠소."[* 이에 반해 트로츠키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딴살림을 차렸다. 대체적으로 혁명가들은 보수적 성향과 거리가 있다보니 연애 문제에 대해서도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다면서 관대한 사람이 많았다. 유명한 여성 볼셰비키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프리섹스를 주장했다. 다만 섹스는 물과 같다고 주장한 콜론타이의 주장은 볼셰비키 당 내에서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았고, 상당한 비판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연애 문제에 대한 혁명가들의 보수성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레닌은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는 없다며 콜론타이를 논파했다. 한편, 콜론타이의 직책이 주로 공사, 대사 등 외교관이었던 것 역시 대단히 명예롭고 대외적으로 소련의 남녀평등을 과시할 수도 있지만, 실권은 별로 없는 자리에 박아넣은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을 따라 러시아에 왔고 그가 집권하는 것을 봤으나, 혁명 이후 창궐했던 티푸스에 걸려 사망한다.[* 당시 유행했던 티푸스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존 리드도 그때 사망한다.] 이네사와 레닌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소문이 퍼진 이후에도, 뜻밖에도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이네사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서로를 혁명 동지로서 존중하고 아껴준 흔적이 편지나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남아 있다. 이네사가 사망한 이후 크룹스카야는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녀를 위한 추도사를 작성해 주었으며, 이네사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앙드레를 후견인으로서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레닌이 바람피웠다는 증거는 없고, 아르망과의 관계는 그냥 소문이다. 그러나, 존경하는 혁명가에게 이러한 '추문'이 도는 것을 불편해 한 볼셰비키들은 레닌 사후, 기록 말살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이네사 아르망에 대한 기록과 레닌과의 연관성을 지워 버렸다. *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였다고 한다. 둘은 초기 공산주의자, 즉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정작 그리피스의 작품들은 심각한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 레닌이 죽은 뒤 시신이 앰버밍 처리되자 미국 언론에서는 그 사진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러다가 라이프에서 사진을 구해 독점 보도로 보도했는데, 알고 보니 장의업계 전문잡지에서 이미 선수를 쳐서 라이프는 뒷북을 쳤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